민간 고용, 직업, 소기업에 대한 편견은 의심할 여지 없이 널리 퍼져 있었고, 종파 간 불신과 카톨릭과 개신 교도들이 연루된 별개의 사회 유지에 대한 훨씬 더 긴 전통을 세웠다.
양측에 대한 의혹은 각 지역 사회가 스스로를 포위 공격 받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불만스러운 문화를 해소시켰고 다른 지역 사회에 대한 의도적인 타격으로 간주했다.
가톨릭과 개신 교도들이 주로 인종 격리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그러한 관념을 더욱 심화시키고 그들을 극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게다가, 성직자 주의와 강한 지역적 다양성은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차별을 거의 피할 수 없게 만들었고, 경찰에게는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려웠다.
차별은 민족주의자들이 유지하는 것처럼 계산되지도 않았고 노조가 주장하는 것처럼 허구적이지도 않았다. 진실은 중간 어딘가에 놓여 있는데 양측은 신화, 비난, 보복, 그리고 북 아일랜드의 중요한 관찰자에게는 사소하게 보이지만 중요하지 않은 세부 사항들에 대한 속임수를 거부한다. 두 공동체가 합의한 유일한 사항-그리고 이 점에서 그들은 성직자들로부터 단호하게 지지를 받고 있다-그들 사이의 장벽은 여전히 견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동 교육, 사회적 상호 작용, 그리고'혼합 결혼'은 세계적인 시도만큼 드물었다.
차별에 대한 매우 철저한 평가를 통해, 선거 관행, 공무원, 경찰, 민간 고용, 공공 주택, 지역 정책 등 다양한 수준의 불평등을 확인했다. 차별은 특히 지역 당국의 수준과 반만 서부 지역의 민족주의자 수준에서 극심했다. 약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신자들이 개신 교도들보다 더 가난하고, 덜 교육 받았으며, 더 실직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가톨릭이 얼마나 불리하게 여기는 지를 비롯해 얼마나 적극적인 차별로 인해 가톨릭이 국가와 그 기능에서 자발적으로 철수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카톨릭 신자들은 처음부터 국가에 대해 대체로 적대적이었으며 이것은 그들의 불충에 대한 개신교의 의심을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지역 사회로부터 RUC나 공무원 자리를 차지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고, 이들 지역에서의 그들의 대표성이 낮게 유지되도록 했다. 그들은 신문, 학교, 클럽, 교회,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통해 일종의 하위 국가를 개발했다. 비이온주의적인 정부들은 카톨릭이 동료 시민들보다 바람직하지 않은 존재라는 생각을 지지하면서, 이 상황을 시정하는데 거의 기여하지 않았다. IRA의 위협이 사라진 후에도 가톨릭 신자들을 통합하고 국가의 개신교 성격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북 아일랜드의 전반적으로 취약한 경제 상황 역시 일자리와 자원에 대한 경쟁을 증가시키고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직업과 자원을 돌보는 비공식적 관행을 강화시켰다. 농업 부문 외에도 이 지역의 경제는 침체되었고 정부는 대부분 이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실업률은 카톨릭과 개신 교도들에게 영국 평균 이상으로 일관되게 유지되었고, 극심한 경제적 고통의 시기는 종종 종파 간 갈등과 동시에 발생했다. 1932년의 가혹한 경제 상황에 저항하기 위해 가톨릭과 개신교의 노동자들이 단결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만큼 독특했다.
북 아일랜드는 연합국의 전쟁 노력에 귀중한 경제적, 전략적 기여를 하였고, 충성심에 많은 돈을 지불하였다. 독일의 폭탄은 Belfast의 일부를 파괴했고 1941년 그 도시를 급습한 한번의 폭격으로 745명의 사람들을 죽였다. 작은 감미료는 북 아일랜드 사람들이 아닌 Stormont에게 국가의 헌법적 지위를 결정할 수 있는 최종적인 권리를 부여한 1949년 아일랜드 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것은 안정감을 주었고 노조의 단결을 온전하게 유지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독일군의 벨파스트 공습의 여파
하지만 노동 조합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판명되었다. 경제적 압박과 가톨릭의 자신감 증가, 그리고 영국의 개입은 통합을 붕괴시켰고 결국 노동 조합의 붕괴와 스토몬트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에 대한 주요 촉매제 중 하나는, 처음에는 지방 자치 단체, 치안 유지, 고용을 포함한 여러 다른 지역에서 가톨릭의 약점이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권 운동이었다. 1964년 사회 정의 운동(CSJ)과 1967년 북 아일랜드 인권 협회(NICRA), 1968년 급진 학생회인 민중 민주주의(PD)등 많은 단체를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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